[그래픽디자이너 강동성 칼럼] 2. 빙빙 돌고 돌아…운명적인 만남처럼 시작한 '그래픽디자이너'
[그래픽디자이너 강동성 칼럼] 2. 빙빙 돌고 돌아…운명적인 만남처럼 시작한 '그래픽디자이너'
  • 강동성
  • 승인 2020.09.02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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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디자이너가 된 두번째 이야기
[글] 디자이너 강동성· 강동성그래픽 대표
[글] 디자이너 강동성· 강동성그래픽 대표

[인생의 황금기였던 중학교 때와는 반대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캄캄함'이다. 그 이유는 캄캄한 새벽에 별을 보고 학교에 갔다가 다시 캄캄한 밤에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반장을 했었는데 일이 너무 많았다. 과제 수거, 게시판 관리, 시설물 관리, 야간자율학습 감독까지... 공부가 아니라 마치 일을 하러 회사에 출근하는 것 같았다. 중학교 시절 전교 1등도 몇 번 하고 반에서는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던 나는 과도한 업무(?)에 지쳐 점점... 성적은 점점 뒤로 밀렸다. 2학년 때도 반장을 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생활은 제대로 꼬여버렸다.


고3 때,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점수는 참담했고 그 결과에 괴로워했다. 서울 중위권 대학 공대에 지원하여 합격은 했지만, 재수가 하고 싶었다. 정말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다. 혹여 실패를 하더라도 남이 정해준 방향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래, 디자이너!

하고 싶은 걸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그 쾌감,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울대 디자인학과를 목표로 했다. 지방에서 서울대 입시를 가르치는 학원은 없었기 때문에 특차(요즘의 수시 개념)로 도전하면 될 것 같았다. 재수 시절 모의고사 성적은 예체능 계열 전국 10등 내외였다. 성적만 따지고 본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서울대 입시는 다른 곳들과 조금 달랐다. 성적으로 2배수를 뽑고 그 이후에 포트폴리오 15점을 제출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다니던 지방 미술 학원은 서울대 입시를 준비해본 경험이 없었기에 포트폴리오 제출에 어려움이 있었다. 부랴부랴 서울로 가서 15작품을 준비했지만 불합격이었다. 입시에 대한 무지가 불러낸 당연한 결과였다.

잡힐 것 같았던 디자이너의 꿈은 저만치 멀어져 갔다. 다른 곳은 아예 지원을 하지 않았다. 서울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교차지원이 가능한 학과들이 있었다. 즉, 내가 예체능 계열로 시험을 봤어도 성적만 괜찮으면 이과나 문과에도 지원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한의학과도 가능했다. 학원 선생님께서 지방 한의학과에도 충분히 가능한 점수니 지원을 하라고 하셨지만, 한곳만 바라보았던 나의 대답은 "No"였다. 삼수를 해서라도 꼭 서울대 디자인학과에 가고 싶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 까... 가끔씩 후회가...

그래서 삼수에 성공을 했냐고? 
그것도 아니다. 삼수 때 모의 수능는 성적은 절정에 달했다. 

'이거, 예체능계 전국 수석도 노릴 수 있겠는데…?'

인생이 내 생각대로 술술 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능 시험 10일 전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을 느껴 그 길로 입원을 했다. 병명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기흉(폐에 공기가 차는 현상) 이었다. 마치 하늘이이 '넌 디자인이랑 안 맞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에 튜브를 꽂고 있었기에 결국 시험을 치를 수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20대는 지독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법대도 한 1년 다녔고 신림동에서 고시생 생활도 한 2년 했다. 무엇이 되서라도 나를 증명하고 그 보상을 받고 싶었다. 현실과 이상이 맞지 않으니 일상이 답답할 뿐이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했다. 서울에서 웬만한 아르바이 트는 다 해봤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26살에 고시원 총무를 하며, 다시 한번 서울대 디자인학과에 도전을 했다. 역시나 1차 합격, 2차 불합격...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서울대 때문에 나의 20대를 엉망으로 보내고 30살이 되자, 한번도 그런적 없었던 어머니가 진지하게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대학교만은 졸업했으면 좋겠다." 

그길로 나는 자퇴했던 성균관대를 다시 찾았고, 학교는 다시 기회를 주었다. 30살에 진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들보다 10년을 늦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가끔 학우들이 '아저씨'라고 놀리기도 하였지만, 다시 시작하는 공부가 너무 신났기 때문에 나이 따위는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한을 풀기라도 하듯 모든 배움에 집중했다. 디자인학은 물론, 신문방송학, 법학, 심리학, 등 닥치는 대로 흡수했다.

디자인 관련 변리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디자인과 법학 공부를 병행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우연히 광고 동아리에서 작품을 전시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작품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집에서 공모전 관련 자료를 찾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어 공모전에 출품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공모전 사무국인데 2등 수상을 했다고 했다. 응?! 기대도 안 한 뜻밖의 결과였다.

첫 공모전 수상 후에 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공모전에 출품을 했다. 와우! 이번에는 1등으로 수상을 하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렇게 쉽게 수상을 하다니... 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음 공모전에 출품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3등이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그래! 이게 바로 내 길이다!

이후 나는 공모전에 빠져버렸다. 상도 상이지만 상금도 꽤 괜찮았다. 다른 친구들은 팀을 짜서 힘들게 공모전을 준비했지만 나는 집에서 30분 정도 아이디어 생각하고 3~5시간 작업하면 다시 뚝딱하고 수상의 결과로 이어졌다. 공모전에 3번 정도 출품하면 꼭 1번은 수상을 하였다. 승률이 꽤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15개 정도의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였다. 학교에서도 꽤 알려져서 학교 홈페이지, 학교 입학 소개서에서도 나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리고 총장님으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재학시절 공모전 수상작 (주최·주관 : 통일 연구원)]
▲재학시절 공모전 수상작 (주최·주관 : 통일 연구원)
[재학시절 공모전 수상작 (주최·주관 :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생활체육회 )]
▲재학시절 공모전 수상작 (주최·주관 :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생활체육회)
[재학시절 공모전 수상작 (주최·주관 : 한국예탁결제원 )]
▲재학시절 공모전 수상작 (주최·주관 : 한국예탁결제원)

공모전에 수상을 이력이 쌓이니 여기저기에서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처음으로 대기업에서 일이 들어온 건 GS 칼텍스였다. 포스터 1장을 디자인하는데 2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내가 디자인으로 돈을 벌다니...'

그때부터 의뢰를 받고 일을 하는 전문 디자이너가 되었다.

[공모전 수상 당시의 모습]
▲공모전 수상 당시의 모습
[공모전 수상 당시의 모습]
▲공모전 수상 당시의 모습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교 뒤편 안암역에 있는 현대건설 본사에서 밤 12시까지 보안요원으로 일을 했다. 밤 12시가 되면 다시 집으로 와서 공부를 했다. 가끔씩 학교 애들과 놀기도 하였지만 나름 성실하게 생활한 결과가 빛을 보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는 많이 늦었고 빙빙 돌아서 왔지만,

그렇게 나는 32살의 나이에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진짜 디자이너가 되었다…(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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