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은 아나운서의 술 in문학] 중국식 룰렛 × 라가불린16년
[유지은 아나운서의 술 in문학] 중국식 룰렛 × 라가불린16년
  • 유지은
  • 승인 2020.10.05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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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이코노미 = 유지은 아나운서]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유지은입니다.

본격적인 술 in문학의 첫 시작은 1화에서 이야기했던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으로 문을 열어보려 합니다.

K가 운영하는 위스키 바는 특별한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벨이 감춰진 세 잔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한 모금씩 마셔본 뒤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인데요. 각기 다른 위스키이지만 가격은 같습니다. 때문에 누군가는 값비싼 행운을 들이켜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값싼 불운을 삼키게 되는 셈이죠.

K의 전화를 받고 위스키 바에 간 ‘나’는 손님 두 명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중 한명의 중년 남성과 함께 왔던 여성과 아내가 좋아하는 위스키가 같다는 이유로 그 여성이 내 아내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그 위스키는 바로 라가불린 16년.
 

라가불린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였다. (...) 물론 라가불린을 좋아하는 여자가 세상에 아내 혼자일 리는 없다. 하지만 때로 공교로운 운명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중국식룰렛>28p, 창비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

라가불린은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아일라 섬에서 만들어지는 싱글위스키 중 하나인데요. 게일어로 물레방앗간이 있는 웅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일라 섬에서 생산되는 위스키의 가장 큰 매력은 피트(peat,이탄泥炭)입니다. 피트는 퇴적되지 못한 석탄의 일종인데 바람이 많이 불고 기온이 낮은 탓에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아일라 섬의 지리적 특성이 이 곳만의 고유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위스키의 주원료가 되는 맥아를 건조할 때 부족한 석탄 대신 이 피트를 같이 태우면서 특유의 향이 스며들게 되는데요. 마치 병원 소독약 냄새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한 향이 위스키에 입혀지게 됩니다.

<중국식룰렛>에 등장하는 라가불린16년

그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아일라 위스키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이 위스키 한 잔에서 아일라 섬 특유의 짠맛부터 해조류, 더불어 스모크한 향과 그 안에 숨겨진 달콤한 과실향까지 입 안 가득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그중에서도 라가불린16년은 위스키 업계의 전설적 평론가인 마이클 잭슨의 극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중국식 룰렛> 속 '나'의 아내가 슬픈 날이면 마셨다는 라가불린 16년. 

강렬한 훈연향 속에 숨겨진 달콤한 과실향처럼 어쩌면 약간의 불행에 감춰진 행운을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모든 위스키는 숙성기간 동안 오크통에서 일정한 양이 증발하게 되는데 이를 천사의 몫(The Angel’s Share)이라고 부릅니다. 작가는 우리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딱 그만큼의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조금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죠.

위스키는 숙성시키는 동안 매년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정도가 증발하죠.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불러요. (...)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중국식룰렛>44p,창비

위스키에 천사의 몫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천사가 가져가는 조금의 위스키정도일지 모릅니다.

때로 불행이 나를 잠시 스쳐가는 순간이 있다면, 라가불린 한 잔을 마시며 곧 다시 찾아올 행운을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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